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요점 정리
지은이 : 황현(黃玹)
형식 : 칠언절구 (七言絶句)의 우국시
제재 : 국권의 피탈(被奪)
성격 : 저항적, 우국적, 고백적, 참여적
압운 : 嚬(빈), 淪(륜), 人(인)
구성 :
1행 - 국권 피탈의 비극성을 자연물에 감정 이입하여 표현
2행 - 망국의 비애 노래
3행 - 자신의 소임을 생각
4행 -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표현 : 활유법, 대유법
주제 : 국난에 대처하는 지식인의 고뇌 또는 일제의 국토 강점에 대한 저항 의지, 국권을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한 지식인의 고뇌 (제1수에서는 작가가 이미 순명(殉名)에 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제2수에서는 망국에 대한 슬픔을 나타냈으며, 제3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제4수는 충(忠)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한탄을 표현하였다. 실린 시는 3수에 해당함)
출전 : 매천집
내용 연구
鳥獸(조수) : 새와 짐승. 금수(禽獸)
哀鳴(애명) : 슬피 욺
海岳(해악) : 바다와 산. 해악(海嶽)
槿花(근화) : 무궁화. 여기서 '槿花世界(근화세계)'란 우리 나라를 일컬음
沈淪(침륜) : 침몰. 몰락
掩卷(엄권) : 책을 덮음
懷千古(회천고) : 지난 날을 생각함
難作(난작) : 하기 어려움
識字人(식자인) : 글 아는 사람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새와 짐승들도 ~ 찡그리니 : 국권 피탈의 치욕을 자연물과 새, 짐승을 통해 구체화한 표현이다. 번역 과정에서 '새와 짐승들'을 '새짐승'으로 하는 경우도 있음. 감정이입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 무궁화는 우리 나라를 뜻하는 대유적 표현이므로 곧 나라가 망해 버렸다는 뜻
가을 등불 아래 ~ 생각하니 : '등불'과 '책'에서이 시와 화자가 지식인임을 알 수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책을 덮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어려운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작자의 고민이 드러난다.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 글 아는 사람은 지식인을 의미하고, 어렵기도 하구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말함
다음 작품이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를 작가의 생애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작품에 담긴 가치를 작가의 생애와 결부시켜 봄으로써 실천적 가치의 중요성을 확인해 보기 위한 활동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문학 활동이 실천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절명시(絶命詩)'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에 주목하여 생각해 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답안 :
: 황형은 유학자로서 시국이 어지러워지자 향리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는 바를 행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후진들에게 바람직한 가치를 가르치던 작가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얼마나 올바른 것이었는가를 입증해 주고도 남습니다. 특히 '절명시'의 마지막 행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라는 대목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심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있습니다.
도우미 황현의 '절명시' : 한일 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상황에서 작가가 절의를 지켜 자결하는 심경을 그려 낸 작품으로 망국에 대한 선비의 통분과 절망을 토로하고 있다. 원래 4수로 되어 있는데 교과서에 제시된 작품은 셋째 수로 어려운 역사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처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역사를 이끄는 힘을 갖지 못한 지식인의 저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하기 :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다음 조건에 따라 삼행시를 지어 보자.
지도방법 : 이 활동은 시조 형식에 맞추어 작품을 창작해 보는 활동이다. 시조의 틀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에 요즘 학생들에게 친숙한 삼행시의 형식을 빌린 것이다. 가급적 제시된 조건에 맞추어 창작 활동을 하도록 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시조의 형식에서 다소 벗어나더라도 용인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시 답안
김 김빠진 콜라 같은 나날들이 너무 싫어.
건 건강하고 활기차게 하루하루 보내고파.
모 모두들 지켜 보세요, 우리들의 미래를.
이해와 감상
황현은 소년 시절부터 과거를 통하여 발신할 것을 꾀하였으나, 막상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나라의 정사가 이미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범연히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국권 피탈의 비보가 전해지자,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조용히 죽음을 택했다. 여기에 실린 것은 그 중 세 번째 작품으로 험난한 역사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처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으며, 이 시의 정서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선비적 지조라고 볼 수 있다. 현실적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을 갖지 못한 지식인의 불가피한 저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황현선생의 죽음은 당시 일본과 세계에 한국인의 기개를 알리는 뜻있는 의미가 되었지만, 자결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은 그 분의 순수한 의도하고는 다르게 많은 아쉬움을 담고 있다.
이해와 감상1
역사적 수난기에 대처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접 역사를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저항적이기도 하고, 외세와 타협하여 민족을 저버리기도 한다. 구한말의 학자이자 시인인 작가는 농촌에서 생활하다가 국권을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선비가 해야 할 도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고민과 고뇌를 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1910년 8월 한일 병합이 이루어지자, 그 소식을 들은 시인은 하룻밤 사이에 '절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어려운 역사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처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역사를 이끄는 힘을 갖지 못한 지식인의 저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하면서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선비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해와 감상2
역사적 수난기에 대처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접 역사를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저항적이기도 하고, 외세와 타협하여 민족을 저버리기도 한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韓日合邦)이 이루어지자, 그 소식을 들은 이 시의 지은이인 황현(黃玹)은 하룻밤에 절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기고 음독 자살하는데, 위 시는 어려운 역사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처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역사를 이끄는 힘을 갖지 못한 지식인의 저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절명시(絶命詩) 네 수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인데,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국민된 이로서 상상도 하기 어려운 재변(災變)이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새, 짐승 같은 미물도 슬피 울고, 산 . 강 . 바다와 같은 자연도 찡그린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나라의 국민은 더 말하여 무엇하리. 더군다나 지식인으로서 작자는 험난한 역사 속에서 처신의 어려움을 통감했으니 자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시에는 이렇듯 조선 선비의 꿋꿋한 기상과 정신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이해와 감상3
1910년 황현(黃玹)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4수이다. 김택영(金澤榮)이 편한 ≪매천집 梅泉集≫(7권, 1911, 상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절명시〉는 작자 황현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하면서 남긴 시이다.
황현은 종사(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하지 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인간 양심의 각성을 외치며 양지(良知)에 순명(殉名 :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해 온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한 사람으로서 순명하였다.
〈절명시〉 제 1수에서 작자는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을 결심해왔음을 말한다., 창천을 비출 촛불에다 자신의 외가닥 양심을 비유하고 있다. “난리통에 어느새 머리만 허예졌누/그 몇번 목숨을 버리렸건만 그러질 못했던 터/하지만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으니/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절명시〉 제 2수는 나라의 종언(終焉)을 고하는 양국조서(讓國詔書)이건만 옥음(玉音 : 임금의 음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하며 슬퍼하였다.〈절명시〉 제 3수는 식자인(識字人)으로서의 자책을 드러내었다. “새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기는 듯/무궁화 삼천리가 다 영락하다니/가을밤 등불 아래 곰곰 생각하니/이승에서 식자인 구실하기 정히 어렵네(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절명시〉 제 4수는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나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 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의 침입 때에 자분(自焚)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하였다. 〈절명시〉는 우국(憂國)의식이 짙은 높은 수준의 시이다. ≪참고문헌≫ 梅泉 黃玹의 詩에 대하여(鄭良婉, 誠信漢文學 1,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 1988).
심화 자료
"절명시" 나머지 수
절명시 一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절명시 - 二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구궐(久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절명시 - 四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내 일찍이 나라 위해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내 죽음은 겨우 인을 이룰 뿐 충을 이루진 못했어라)
겨우 능히 윤곡(尹穀 )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이제 겨우 윤곡처럼 죽음에 거칠 뿐)
당시의 진동(陳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그때의 진동처럼 나라 위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윤곡 :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진동 :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황현의 다른 시 바로 가기
최익현의 창의시 바로 가기
황현(黃玹 )
1855(철종 6)∼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시묵(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매천야록 梅泉野錄≫·≪오하기문 梧下記聞≫을 지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해 놓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 東匪紀略≫ 등이 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運動之血史,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철 -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전남 구례에는 왕석보라는 인물이 있었다. 나라가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경술국치 직후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황현 선생은 왕석보와 그의 아들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실학적 전통과 자주적인 역사인식을 가지고 항일구국 운동에 전력했던 이기, 그리고 나철도 황현과 마찬가지였다.
왕씨의 집안엔 학문과 절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고려 왕조의 성씨였던 개성 왕씨로 왕석보의 7대조 왕득인, 8대조 왕의성은 정유재란 때 섬진강 길목인 석주관 전투를 주도하고 왜군과 싸워 순절한 인물들이다. 황현과 이기, 나철의 행적에서 우리는 면면한 절의 정신과 학행일치의 전범을 찾을 수 있다.
단군을 숭앙하는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 선생이 태어난 곳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이다. 벌교읍에서 국도 2호선을 따라 보성읍 방향으로 3km쯤 가다 보면 오른편 쪽 언덕진 동네다. 동네 들머리 왼쪽에는 유적비가 서 있었다. (중략)
여러 의사들이여! 여러 의사들이여! 금일지사는 대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우리 이천만 중생의 생사문제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청컨대 결사의지로 이 오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소제하면 우리들 및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으나 그 성패가 오늘의 일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의무를 주창함에 눈물을 흘리며 피가 스미는 참담한 마음으로 엎드려 파기 뛰며 지혜와 용기를 갖춘 여러분들의 면전에 이 의(義)를 제출합니다.
나철이 '을사5적'을 암살키 위해 작성한 격려문이다. (중략)
나철은 국운이 기울자 이를 기점으로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고 국권수호 운동에 몸을 던졌다. 1896년 아관파천의 일차적 책임자였던 김윤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함께 보냈다. 1916년 8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내가 이 목숨을 끊는 것은 내 정신이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숨을 끊었다. 자신의 순교로 조선의 민족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출처 : 권경안 글/ '보성을 말한다' 학연문화사)
나철(羅喆)
1863(철종 14)∼1916. 대종교의 초대 교주·독립운동가. 본관은 금성(錦城).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발 노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 三一窕誥≫와 ≪신사기 窕事紀≫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友),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박호암(朴湖巖),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고,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 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참고문헌≫ 大倧敎重光六十年史(大倧敎倧經倧史編修委員會, 大倧敎總本司, 197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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