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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가 붙잡으려 했던 빛의 순간들

예성 예준 아빠 2009. 5. 30. 00:14

르누아르가 붙잡으려 했던 빛의 순간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그네·시골무도회·해변의 소녀 등 118점
일렁거리는 빛과 내면 ‘말 걸어오는 듯’

 

르누아르의 대표작에 속하는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 <바느질하는 마리-테레즈 뒤랑-뤼엘>.

 

인상파 미술의 선구자’, ‘행복을 그리는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를 일컫는 이 말은 전시를 보기 전 주최 쪽의 말이다. 28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작한 ‘르누아르’전을 보고 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르누아르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말을 걸어온다. 아니, 그림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인물화) 또는 그곳(풍경화), 그것(정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네>(1876). 그네 탄 소녀를 중심으로 남성 둘, 계집아이 하나가 있다. 소녀는 볼이 발그레하니 부끄러운 듯 그네 한쪽에 기대어 있다. 옆모습의 남자가 열심히 말을 건네는데, 소녀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런데 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또다른 남자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소녀와 내연 관계인 듯도 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처럼도 보인다. 옆쪽 계집아이의 뽕 뚫어진 눈에 언니 오빠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 르누아르의 대표작 <그네>.
1876년 파리를 한 컷으로 잡아낸 듯한 이 작품에는 그네의 일렁거림, 등장인물들의 일렁거리는 내면과 함께 푸른 나무 그림자 사이로 내려앉은 햇빛이 일렁거린다.

 

이 작품은 1877년 세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돼 대상을 윤곽선으로 표현하는 그림에 익숙한 미술 평론가들에게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가 에밀 졸라를 매료시켜 몇달 뒤 그의 작품 <사랑의 한 페이지>에 세 문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 옆 작품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1875~1876). 두번째 인상파전에 슬그머니 끼워넣은 작품으로 “완전히 부패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초록색과 파란색 점들로 이루어진 살 덩어리”라고 당시 신문 <르 피가로>는 혹평했다.

 

지금 시선으로 봐도 그 이상의 평을 하기 힘들어 보인다. 소녀의 알몸은 언뜻언뜻 빛을 받은 정물처럼 물질화된 반면 엉클어진 머리, 발그레한 볼의 두상은 특정 소녀의 것이어서 몸과 머리는 이어붙인 것처럼 어색하다. 그리다 만 것처럼 뭉툭한 손은 어떻고….


» 류머티즘을 앓아 휠체어에 앉은 만년의 르누아르.

여든 살까지 작품 5000여점을 쏟아낸 르누아르가 실제 인상파적으로 그린 기간은 불과 10여년. 이 전시회에도 15~16점에 불과하다. 하루 중 한때 나뭇잎을 뚫고 내려온 햇빛처럼 순간 존재했던 것. “인상파 그림을 살 수집가는 파리에 15명 남짓이고 나머지 8만명은 살롱전 화가의 고객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롱전에 출품한다.” 르누아르는 인상파 투사가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하고 여느 남자처럼 여성을 좋아하는 화가였을 뿐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은 자신의 그림을 팔아주는 몇몇 화상과 자기의 아들뿐이다. 훗날 <시골무도회>, <해변의 소녀>, <피아노 치는 소녀> 등 아름다운 여인상 앞에서 어정거릴 남정네 관객들을 염두에 둔 것일까.

 

그림의 누드 모델 가브리엘에 주목하면 전시가 더 재미있다. 그는 르누아르의 아들 장의 보모 겸 식모이자 필요할 때마다 화가가 벗겨 뉘었던 일석삼조의 여인이었다. 짙은 눈썹에 광대뼈가 튀어나왔지만 풍만한 몸매를 지녔다.

 

만년 작에서 붓터치가 흐물흐물하거나 신체 비례가 흐트러진 것은 아무래도 류머티즘으로 손이 곱은 탓이지 싶다. 모두 118점이 걸린 이 전시는 9월13일까지 계속된다. 6000~1만2000원. (02)714-2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