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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자료] 교사들이여 경건을 연습하라

예성 예준 아빠 2009. 1. 9. 20:47

바울사도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7-8) 고 자상하게 타이르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오늘의 교사와 오늘의 주의 어린이" 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다. 먼저 {경건}, 혹은 {경건 생활} 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경건} 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Greek 어(語) 로 {유세베이아} ευσεβεια 이다. 그리고 그 뜻은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올바른 존경" 을 말한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 받았으며 (이사야 43:7)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본분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을 좋아했다. 그래서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창 3:5) 는 꾐이 있을 때 자원하여 범죄하게 된 것이다. 그날 후 인류는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앉게 하는 일을 거부하고 살아오고 있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여기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금까지 내가 나의 주인인줄로 생각하고 살아오던 삶에서 돌이켜 "내가 나를 창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내가 나의 주인일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 내가 내 주인인줄로 착각한 것이 죄이며 이제 내 죄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고 하나님께서 본디 의도하셨던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해 창조된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생각하고 결심하고 또 말씀을 듣는 것이 {참 신자} 가 되는 것이다.

신자는 경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경건 생활은 내가 좀 더 착한 사람이 되며 기도하며 예배를 잘 드리며 헌금을 잘 바치고 또 전도하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하고 또 그 결심한 것을 힘써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건 생활을 잘 하다보면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권장하는 것이 경건 생활을 하도록 하는 길이 될 수는 없다. 경건 생활이란 앞서도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모시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한다면 전에는 내가 내 주인이었으니까 잠을 자고나서 다시 밤을 맞이하여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것 즉, 오늘을 어떻게 살까? 무엇을 먹을까? 누구를 만날까? 어떻게 말할까? 무슨 일을 할까? 누구와 사귈까? 무슨 직업을 가질까? 어디서 살아야 하나? 수술을 할까 말까? 용서할까? 손해를 각오하고 한번 큰소리치고 할 말 해줘야 하나? 등 등 이렇게 {내가 생각} {내가 결정} {내가 추진} 하는 것들은 그것이 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혹은 잘된 것이든 못된 것이든 간에 적어도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시지 않는 것" 이란 점에서는 한가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오늘 {디모데} 라는 제자에게 {경건을 연습하라} 고 쓴 스승 {바울} 은 그가 예수님께 회심 이전의 삶은 바로 이렇나 것임을 얘기하고 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한 후에 줄곧 {자신이 생각} 하고 {자신이 결심} 하고 {자신이 추진} 하며 살았던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매우 입지적인 삶이었다.

그래서 훌륭한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개인 교수를 받았고 그래서 자신도 촉망되는 율법 학자요 젊은 패기와 명석한 판단력과 추진력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삶의 내용은 {생명의 주}를 거역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의 {훼방자} 였던 것이다. 혼돈이요 공허요 모순이요 방황의 연속이었던 것은 나중에 그가 진리를 알고나서 깨달은 바였다. 그의 제사장 방문과 자원하여 다메섹 신자들의 결박과 호송을 떠맡은 것은 진리 발견 이전의 삶의 표본같은 것이었다. 이 몹쓸 {자주자 사울} 을 예수님께서 사망의 음성을 들려 주시고 광휘로운 영광의 빛을 보여 주셨고, 그 빛을 인하여 눈이 멀어져 길바닥에 엎드려 절망의 목소리로 "주여! 뉘시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때 바울은 그의 {자주자} 로서의 실패를 뼈에 사무치게 깨닫게 된다. "주여, 제가 무엇을 하오리이까?" (행정 22:10) 이 말씀을 유의해보면, "내가 잘못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제가 새로운 삶을 살겠습니다." 가 아니라 "제가 무엇을 하오리까?" 인 것이다. "제가 이제는 저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전도자가 되겠습니다." 가 아니고 "제가 무엇을 하오리이까?" 인 것이다. "제가 주님만을 위하여 사랑과 충성 다 바치오리다." 가 아니고 "제가 무엇을 하오리이까?" 인 것이다. 여기서 경건 생활의 참모습을 보게된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 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님 당신이 내 주인} 이시니 "제가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오리까?..." 하는 여기서 경건 생활은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께 묻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을 위해 내가 결심하고 결심을 굽히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인격을 싫어하신다.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을 안 후 그 주님의 뜻에다 나의 뜻을 맞추어서 때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을 때도 순종하는 인격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이같은 순종의 인격이었고 모세가 그랬으며 여호수아와 다윗이 그러하여 주님이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경건 생활을 지도할 때는 자주 {다윗} 의 삶을 예로 사용한다.

다윗도 우리도 다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다윗} 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인격적으로 존경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것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있다. 또 우리에겐 제각기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실수도 자주 범하게 된다. 그러나 {다윗} 에게도 약점은 있었으며 그도 실수를 범하였다. 다윗의 실수는 매우 큰 것이었으며 그 실수를 은폐하려는 과정은 매우 악랄하기까지 한 것이었음을 성경은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여느 사람들은 여기서 좌절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다윗은 재기했던 것이다. 다윗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다윗의 실수는 범죄 이전의 삶보다 범죄 이후 하나님의 꾸중을 크게 받은 후의 삶이 더욱 그를 존경스럽게 한다." 다윗이 이러한 궁지에서 낙망하고 좌절치 않고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을까? 그 놀라운 재기의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 대답은 {다윗} 의 경건 생활에 있었다. 즉, 다윗은 이른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곧장 하나님을 뵙는 자리로 옮겨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제가 주님을 의뢰하옵니다. 저의 다닐 길을 알게 하옵소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옵니다." (시편 143:8) 그리고 {다윗} 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으며, 묵상중에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왜, 이 말씀을 주시는 가를 알게 되었으며 그 말씀에 의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무리했던 것이다. 또 말씀을 묵상한 후에는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한 기록도 참고할 수가 있겠다. "하나님이여, 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옵소서. 저의 마음을 통촉하소서. 저의 왕, 저의 하나님이여 저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 제가 주님께 기도하나이다." (시편 5:1-3) 바로 이러한 다윗의 삶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며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으며 또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참 신앙인이 되게 했던 것이다. 이 다윗처럼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묵상하고 그 말씀에 의하여 하루를 계획하고 기도하며 실천하는 삶" 을 경건 생활 이라고 한다. 태풍이 부는 날에 바다에 뜬 모든 것은 바람의 영향을 받아 바람 부는데로 휩쓸려 가게 된다. 그런데 빙산은 그렇지 않다. 바람부는 데로가 아니라 해류를 따라 힘차게 제 길을 간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밖으로 나타난 부분보다 감추어진 부분이 약 10 배나 더 크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이 정규적이 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에 익숙한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줄 알며 또 그 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게된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시간 이러한 인격이 되어주기를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며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건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주기를 원하고 계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경건 생활 연습을 생각해보면,

1. 먼저, 주님이 나를 부르신 사실에 내가 기쁜 맘으로 만나기를 작정하는 일이다.

사실, 경건 생활은 내가 주님을 찾으려 애태우며 바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찾고 계심에 내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만남을 참으로 기뻐하여 "내가 새벽이 되기 전 주님께 부르짖으며 주님의 말씀을 바라옵니다." (시편 119:147) 하는 고백이 되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2. 주님과 대화하기 가장 좋은 시간을 정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새벽 동녘이 밝아오기 전 시간을 아버지를 만날 시간으로 했다. 그러나 생활에 따라 각자가 가장 합당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그리고 주님과 단 둘이서만 방해받지 않고 대화할 장소를 정한다.

서재도 좋고 옥상도 좋으며 가까운 곳에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 바위가 있으면 더욱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현재 손쉽게 차지할 수 있는 곳으로 먼저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4. 매일 묵상할 말씀을 영적 지도자와 의논하여 정하는 일이다.

내가 스스로 성경 말씀을 읽을 곳을 지정한다면 주님이 주시고 싶은 곳보다 내가 읽고 싶은 곳을 택하기 쉽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읽는 곳은 영적 지도자가 잘 정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가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먼저 이렇게 고백하는 일이다.

"아버지여! 제가 부름을 받고 여기 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잠깐 기다리십시오. "주님의 임재와 내 영의 안정이 올 것입니다." 라고 말이다.

6. 그리고 이렇게 말씀 드린다.

"아버지여 저는 오늘 성경 말씀 ○○ 서 ○○ 장을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직접 제게 그 뜻을 알게 해 주시고 ① 왜 ② 오늘 ③ 이 말씀을 ④ 나에게 주시는지도 깨닫게 해주옵소서."

7. 그다음 주신 말씀의 뜻과 나의 삶에 적용할 내용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때 적용은 ① 개인적이며 ② 실제적이며 ③ 내가 당장 실천하기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8. 그리고 주님께 말씀 드린다.

"주님 오늘 ~ 서 ~ 장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저는 이렇게 깨달았으며 그래서 이렇게 행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대로 실천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고 드리겠습니다. 실천할 때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이끌어 주시고 힘도 주시고 뜨거운 마음도 주시옵소서."

9. 그 다음은 나의 영적 지도자에게 오늘 한 경건 시간의 기록을 그대로 보고하는 일이다.

또 같은 반열의 영적 동료에게도 서로 보고하는 것이 좋다.

10. 주님께로부터 오늘 나에게 배달된 생생하고 또 기대감을 갖고 사랑으로 주신 말씀으로 굳게 믿고서 곧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11. 잠들기 전에 한 번 더 경건 기록을 살피면서 하나님께 보고하는 일이다.

잘된 일은 영광을 돌리며 잘 안된 일도 소상히 말씀드리며 새 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12. 할 수 있거든 속히 잠자리에 드는 일이다.

내일 새벽 또 주님과 만남을 가슴 설레이도록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다.

몇가지 실제적 제언

1)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무 많은 일에 분주해진 마음보다 조용히 주님과 대화하는 것을 더욱 귀히 여긴다. 그리고 가지를 쳐야 충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처음에는 너무 긴 시간으로 계획하지 말고 짧을지라도 시작하는 것이다. 재미가 붙게되면 자연히 길어지고 더욱 기쁨이 될 것이다.

3) 꼭 영적 지도자와 대화해 가면서 계속하는 일이다. 영적 동료도 두세분 있으면 서로 도움이 된다.

4) 실패한 날도 있게된다.

계획이 없다면 실패도 없겠지만 계획이 있으면 실패도 있다. 그러나 계획이 없어 실패 없는 것보다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실패자가 주님과 더욱 가까워진다. 교만은 가고 겸손해지며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적 인격이 될 수 있다.

5) 날마다 주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 그럼 지금 곧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