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바의 유래
최귀동(베드로)할아버지가 40여년동안 사랑을 실천했던 무극천 다리. | |
1976년 9월 10일 무극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오웅진 신부와 최귀동 할아버지 | |
81년 겨울 최귀동 할아버지의 동료 걸인들 벙거지를 쓰고 망태기를 맨 할아버지가 최귀동 할아버지이다. | |
카톨릭대상 (사랑부문) 수상 무극에서 부잣집 귀한 아들로 태어나 날때부터 귀동이라 불리웠던 대장부가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 심한 고문끝에 정신병을 얻어 고국에 돌아와 보니그동안 부모님들은 아편 중독으로 돌아가시고 가정은 파산되어 갈 곳조차 없게 되어 무극다리 밑에 거처를 정하고 살면서 오갈 데 없고 얻어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죽어가는 걸인들을 위하여 40여년간 남는 밥만 얻어 그들에게 나눠주었고,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 숭고한 사랑의 실천으로 86.2.15 가톨릭 대상(사랑부문)을 수상했으며, 부상으로 120만원을 받았다. 이에 따른 축하잔치가 2.16 무극성당에서 있었는데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 노건일도지사, 사단장, 교육감등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극국교 어린이 고적대의 밴드에 맞추어 카퍼레이드 후 주민들과 함께 축하식을 가졌다. 사진은 축하식에 참석한 내빈들과 함께 찍은 것. | |
휠체어에 앉은 이가 최귀동 할아버지와 오웅진 신부 | |
노인 요양원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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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1월 4일 오후 1시 15분 평소 지병인 혈압이 재발하여 인곡자애병원에 모셔진 할아버지는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어" 이 한마디 조용히 남기고 떠나셨다. 84년 2월 28일자로 눈 못보는 형제를 위해 사망후 안구를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겨 27세 된 젊은 청년이 눈을 보게 되었다. 장례식은 1월 8일 오후 2시 3,000여명의 꽃동네 회원과 꽃동네 가족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청와대 김옥숙 영부인이 보낸 조화와 국무위원, 충남북도지사, 군수님이 보낸 조화속에 묻혀 명복을 비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라고 새겨진 바위 밑에 고이 인장되었다. 이제 최귀동 할아버지는 영원한 꽃동네 사람으로 모든 이의 가슴마다 남게 되었다. 1991년 1주기에는 그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만들고 회원님들이 보내준 부의금으로 2.5m 높이의 동상을 만들어 제막식을 가졌다. |
[각설이와 품바의 차이] 품바란 각설이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는 일종의 장단 구실을 하는 의성어로 전해왔으나 현재는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되었다. 품바란 낱말이 처음 기록된 문헌은 신재효의 한국 판소리 전집 중 '변강쇠歌'이다. 여기에서 보면 품바란, 타령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소리라 하여 '입장고'라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이조 말기까지는 이런 의미로 통했을 것이다. 그후 일제, 해방, 자유당, 공화당 시절에 이르기까지는 '입방귀'라는 말이 널리 일반화되었는데 그것은 '입으로 뀌는 방귀'라는 뜻이다. 고금을 막론코, 피지배계급(가난한 자, 역모에 몰린 자, 관을 피하여 다니는 자, 지배계급에 불만을 품고 다니는 자, 소외된 자 등)에 있는 자들이 걸인 행세를 많이 하였는데 그들은 부정으로 치부한 자, 아부 아첨하여 관직에 오른 자, 기회주의자, 매국노 등의 문전에서 "방귀나 처먹어라 이 더러운 놈들아!"라는 의미로 입방귀를 뀌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恨)과 울분을 표출했다 한다. 또한 품바란 가진 게 없는 허(虛), 텅 빈 상태인 공(空), 그것도 득도의 상태에서의 겸허함을 의미한다고 전하며 구걸할 때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예, 왔습니다. 한푼 보태주시오. 타령 들어갑니다." 등의 쑥스러운 말 대신 썼다고들 한다. 또, 품바란 한자의 '품(稟)'자에서 연유되어 '주다', '받다'의 의미도 있다. 또 달리 '품'이란 품(일하는 데 드는 수고나 힘), 품앗이, 품삯 등에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허나, 전해 내려오면서 명칭의 변화는 있었지만 거기에 함축된 의미가 "사랑을 베푼 자만이 희망을 가진다"라는 말로 변해왔으며, 이 노래(타령)만은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났을 때 반드시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렸던 것이 다른 노래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품바의 기수 별 이름] 품바 1대는 김시라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2대부터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리고 현재 김시라선생님은 돌아가셨다고 하는군요. 그러면 2대부터 현재 몇대까지 있나요? 그리고 2대품바부터의 성함들을 알수 있을까요? 3대 박동, 4대 김영래, 6대 김규형, 7대 김기창, 9대 최성웅, 10대 여성 품바 박해미 11대이가경, 14대 선현욱, 15대 박철민...다 알지는 못하겠네여... 품바에 대한 기사입니다..... [화제의인물] 남편 추모 공연 무대에 올린 <품바> 작가 고(故) 김시라씨 부인 박정재 “그의 첫여자이자 마지막 여자로서 남편이 생전에 몸바쳤던 연극의 길 가렵니다” 누더기 차림에 찌그러진 깡통, 벙거지를 눌러 쓴 품바. 80년대 소극장 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품바>가 올해로 20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품바>를 탄생시킨 작가 겸 연출가 고 김시라 선생의 갑작스런 타계로 기쁨으로 들떠있어야 할 <품바>는 추모 공연의 성격을 띠게 됐다. 연극계의 동료이자 반려자로서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품바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내 박정재씨를 만나 애끊는 사부곡을 들어보았다. “이눔들아! 사람이란 누구나 서로 얻어묵으며 사는 법이여. 거렁뱅이들이 있응께 느그눔들이 우쭐대고 모지런 눔들이 있응께 느그들이 웃을 여유도 있어야. 이것만은 느그들에게 적선하는 것이야. 이눔들아!” <품바> 20주년 기념공연 준비가 한창인 성북동 연습실을 찾았더니 3대 품바 박동과씨와 9대 품바 최성웅씨의 연습이 한창이다. 그리고 연습실 한 귀퉁이에는 고인의 아내 박정재씨(39)가 앉아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주일 후인 6월 6일. 동숭홀에서 시작된 <품바> 20주년 기념 공연은 첫 주 부터 두 번에 걸쳐 표가 매진되는 만원사례를 기록한다. 5백석이 넘는 대극장 연극 공연으로는 드문 기록이지만 이때까지 <품바>가 세워온 기록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다. ‘공연 횟수 4천5백여 회, 관객동원 2백만명’. 1981년 초연 이후 4천5백여 회의 공연 기록을 보유하자면 단 하루도 쉬지 않은 채 12년 4개월이라는 시간을 꼬박 무대에 바쳐야 한다. 이는 한국 기네스 북에 올랐던 기록이다. 그러나 이처럼 <품바>에 애정을 보였던 작가 겸 연출자 김시라씨(56)는 지난 2월 8일 <품바> 2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 요한(13)의 중학교 입학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부친 김두성옹(81)을 남겨둔 채…. 남편이 남긴 무대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건 아내 박씨였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연기처럼 그렇게 홀연히 가버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요한이 아빠가 살아서 이 무대를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박씨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2년 전부터 공들여서 20주년 품바 기념 무대를 준비하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는 눈물을 훔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공연을 미루라고 권유했지만 박씨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남편을 대신해 공연 제작을 떠맡았다. ‘그가 얼마나 아꼈던 <품바>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 주저앉아 울기만 할 수가 없었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홀연히 가버린 남편 그렇게 팔 걷어붙이고 추진해서 3대 품바 박동과와 7대 품바 김기창, 9대 최성웅, 14대 선현욱 등 4명의 품바를 한자리에 끌어모을 수 있었다. “어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구성진 각설이타령이 시작된다. 잠시 후 객석은 걸쭉한 해학과 통렬한 풍자가 살아 숨쉬는 난장이 된다. “앗따 생각보다 훨씬 잘 부르네. 그럼으로써 여러분께서도 거렁뱅이로써 손색이 없음이 증명된 셈이네. 친애하는 각설이 동지가 되었다 이 말씀이여. 자 그럼 여러분이 천사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박수!” 배우들은 관객과 무대 사이에 쳐진 보이지 않는 금을 걷어내고 하나가 되도록 이끈다. “광주의 초연 무대는 그야말로 자지러지게 웃다가 종국엔 눈물바다가 됐죠. 서울로 공연을 옮겨오면서 한이 줄어들고 희극적 면모가 강화되었지만 남편은 광주의 그 눈물, 해원의 눈물이야말로 <품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남 무안군 일로면 출신인 고 김시라 선생은 원래 시를 썼다. 인사동의 어느 카페가 이름을 따오기도 한 ‘오!자네 왔능가’같은 구수하면서도 정겹고 흡인력 있는 시를 써오던 그는 80년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광주의 한을 어떤 식으로든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즈음 접한 연극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로 하여금 연극의 세계에 눈뜨게 만들었다. “남편은 고향을 끔찍이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5·18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걸 처음에는 시로 표현했는데 주변에서 발표하지 못하도록 다락에 시를 숨겨놓곤 했었대요. 나중에 시를 발표할 요량으로 보니 쥐가 다 쏠아버려서 원고를 하나도 못 건졌죠. 아마 시혼을 태우지 말고 연극을 하라는 하늘의 뜻이었나 봐요.” 흔히 ‘천사촌’이라 불렸던 무안 걸인촌에서 거지왕 천장근을 만나고 그를 소재로 1인극 각본을 쓴 게 <품바>의 탄생 계기. 고 김시라 선생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였지만 공연때마다 직접 ‘북잽이’가 되어 품바들을 도우며 자신도 신명을 내곤 했다. 박씨가 남편을 만난 계기도 <품바>였다. 서울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극단을 기웃거리던 박씨가 86년 <품바> 공연을 보러 갔던 것이 인연이 됐다. 남편은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고 그는 선뜻 동의했다. “남편은 저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못 느꼈다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연애하는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프로포즈할 때 고백하더라고요. 그에겐 제가 첫사랑이고 첫 여자이며 마지막 여자였어요.”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살이었고 남편의 나이는 마흔두살이었다. 무려 열 일곱살이나 나이 차가 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고 한다. ‘워낙 된 사람이다’라고 판단한 박씨의 부모는 ‘늙은(?)’ 사위에게 선뜻 딸을 주었다. “처음엔 워낙 동안이어서 그렇게 나이가 많은지도 몰랐어요. 요한이 아빠를 처음 만난 후 지금껏 한번도 그 나이를 의식해본 일이 없어요. 사람이 정말 착하고 순수했어요. 그런데도 무대에만 서면 광기가 분출됐죠. 그 순수와 열정이 섞인 모습에 반했죠.” 남편은 그에게 현모양처를 기대하지 않았다. ‘자기 일을 갖고 열심히 사는 아내’를 더 좋아했던 남편 덕에 그도 대학로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다. 연극 기획부터 포스터 붙이기, 극단 재정관리 등 안해본 일 없이 다 했다. 나중에는 배우가 못 나올 경우 배우로 무대에 설 정도였다. 13년의 결혼 기간 동안 내내 그는 그렇게 맘 맞는 동료이자 착한 남편이었고 세 남매에게는 다정다감하고 좋은 아빠였다. “아이 셋을 업고 안고 손 잡고 사무실을 다닐 정도로 아이들에게 극진했던 아빠였어요. 아이들이라면 물고 빨고 좋아하던 모습이 눈 앞에 선해요.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는 애 아빠가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아직도 아빠의 죽음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타임머신을 사서 아빠가 있는 데로 갔다 오고 싶다”는 철부지 막내의 투정에 그는 막막한 가슴을 누를 뿐이다. “차라리 부부싸움이라도 많이 해서 섭섭한 추억이라도 남겨줬더라면…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린 한번도 싸운 적이 없거든요. 그가 늘 제 의견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죠. 너무 좋은 사람이라 하느님이 일찍 데려가신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은 <품바>의 성공으로 ‘김시라가 돈을 많이 벌었을 거다’라고 추측하지만 김씨는 어디서 돈을 받으면 세어보지도 않고 봉투째 좋은 일 하는 단체에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품바> 테이프를 발매하면서 계약서 한장 안 쓴 그였다. 덕분에 로열티는 한푼도 못 받았다. 이렇게 경제 관념이나 속 계산 없이 그저 남에게 퍼다 주는 것만 좋아하는 남편에게 잔소리도 많이 했던 박씨였다. “보통 여자였으면 못 견뎠을지도 모르지만 저도 배포가 좀 큰 편이거든요. 나중엔 그러려니 하게 되더라고요. ‘돈 없으면 내가 먹여살리지 뭐’ 이러고 말았어요. 그래서인지 나중엔 애 아빠도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제게 일임하더라고요.” “동료이자 남편, 아빠로서 백점이었다” 두루마기 한복을 즐겨 입고 긴 머리를 하고 다녔던 김시라 선생. 그는 평소 연극인들보다는 시인들과 친했다고 한다. 그 자신 시인이기도 했지만 기존의 서구 연극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연극인들이 그의 스타일을 썩 반기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솔직히 연극계에서 <품바>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인색한 것이 야속해요. 밖에서는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느니 하면서 평가해주는데, 연극계 안에서는 아직도 ‘그게 연극이라고 볼 수 있느냐’고 뜨악해 하거든요. 연극계의 비판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섭섭한 건 사실이에요.” 평소 연극은 그 나라 그 민족의 역사와 삶을 기반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편을 대신해 박씨는 말을 이어나갔다. “<품바>는 우리 고유의 각설이 타령, 그리고 마당극 형식을 무대극과 결합시켰죠. 그리고 그 속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나눔과 베품’이었어요. 주어진 걸통에 채운 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정성껏 전하는 것’을 ‘진정한 나의 할 일’이라고 했던 그이에요.” 이런 보편적이지만 절절한 메시지는 온 국민의 마음을 울렸다. <품바>는 단순한 연극이 아닌 살풀이에 가까웠던 것이다. 2백만명이 봤다는 기록은 단순한 수치를 넘어선다. 그러나 <품바>가 대중적인 인기몰이를 했다고 해서 마냥 순탄했던 건 아니다. 서슬 퍼런 80년대 후반, 가진 자, 힘있는 자에 대해 공공연하게 통렬한 어퍼 컷을 날리는 연극 무대는 당연히 정부의 눈엣가시였다. 공연에는 늘 안기부 직원이 따라다녔다. 정부의 방해로 해외 초청 공연이 무산되기도 했고 공연을 앞두고 주연 배우들이 공교롭게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도 고 함석헌 옹 말대로 ‘바로 우리의 연극’이었던 <품바>에 대해서 직접적인 탄압을 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품바> 2탄 격인 <남바>는 공연 금지를 당했고, 귀순자 문제를 다룬 <코리랑>도 중도에 막을 내려야 했다. “이번 공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그의 지난 삶을 생각해보면서 이렇게 살다 간 사람도 있다고 기억해주신다면 좋겠어요.” 박씨는 또한 지난 1월 무대에 올리려다가 도중에 포기해버린 자신의 작품 <사이코 바이러스(가제)>도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그가 처음으로 극본과 연출까지 도맡았던 작품이었지만 갑작스레 남편이 타계함에 따라 그는 무한정으로 공연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편 역시 자신이 다시 일어서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면 머뭇거릴 수가 없다고. “일할 땐 괜찮은데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요. 하루에도 몇 번씩 시시때때로 남편이 보고 싶어요.” ‘오! 자네 왔능가! 이 무정한 사람아 (…) 자넨 묵이나 갈게 난 자우차 끓임세.’ 남편이 이렇게 맞아줄 그 날까지 박씨는 그가 터 닦아 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갈 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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