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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

예성 예준 아빠 2010. 6. 7. 15:00

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



학생 앞에 선 그리스도의 증인

필립 메이 (IVP)


서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자신의 삶과 직업이라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실제로 학교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이다. 전에 우리가 주님을 학교에 모시고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이미 그 곳에 계신 것과, 우리는 단지 그 곳에 계신 그 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교사로서 당신이 가장 중시하는 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 교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교사인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높은 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바울은 디오데후서에서 그 답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 쓰라" (딤후 2:15)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지식과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분변해야 한다. 당신은 매일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말속에 말씀의 순수함과 진리가 고루 퍼지도록 해야 한다.


제 1 장 증인이 되는 일

증거에 대한 성경의 견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 일을,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이나 이 직무를 위해 교회에서 따라 세우심을 입은 전문가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곳에 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어디 출신이든지 그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주 예수님은 당신이 증인으로 나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특징 짓는 네 가지 요소를 강조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심; 첫 번째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모든 증인들은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너희’, 당신들 모두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당신을 말하며 지금까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시키시는 일이 어떤 것이든 그 분은 당신이 증인이 되도록 부르셨다. 인생의 법정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증인이 되라고 그 분은 당신을 지명하셨다.

-지상 과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하도록 명령받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증거하라고 요청하시거나, 그것이 우리 중에 일부가 담당할 선택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분명히 증인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그 일을 맡기신 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만드는 핑계들은 권위 있는 그 분의 말씀에 비추어 너무 무력해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장소에서 모두 증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준비시키심;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증거를 위해 준비하신다는 사실이다. 먼저 당신을 잘 준비시키시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일하라고 당신을 부르시지 않는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분이 선택하신 종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라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것, 어느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한다면 -이것이 모든 일의 열쇠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한 때에 적합하게 할 말을 주실 것이다.

-증거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네 번째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어떤 증인도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증인은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하여 그 곳에 서 있는 것이다. “너는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의 모든 증거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그것은 그 분의 복음, 그 분의 가르침, 그 분의 구원 사역, 그 분의 권한과 결정, 심판하시러 다시 오심, 우리가 사람에게 말하고 제시해야 하는 그 분의 본질과 뜻이다. 당신이 진실하게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그 분의 능력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인이 알아야 할 세 가지 사실; 첫째, 증인은 항상 대중 앞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다. 법정에서 그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름, 주소, 직업을 밝히는 일이다. 동료 교사나 학생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을 설교도, 조정도, 세뇌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솔직하고 정직한 일이다. 우리는 매일 언어, 몸짓, 얼굴 표정, 행동, 교수 방법을 통해, 수업시간, 수업 외 시간, 교무실, 운동장에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 교사가 과학이나 문학, 수학, 음악, 혹은 어떤 과목이든지 수업을 해야 할 때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의 현재 모습을 통해 항상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이다. 두 번째는 증인은 결코 연극의 주연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생각의 덫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항상 증거해야 할 유일한 인물이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왕 중의 왕이며 주(主)중의 주(主)인 그 분을 위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놀라운 특권이며, 그런 공공연한 증거에 수반되는 불안과 핍박을 압도하는 특권이다. 그러나 증거에는 고통과 자기 부정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러한 결과에 대해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제 2 장 그리스도인 교사의 모습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1-2)

책임있는 직무; 교직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교사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심판받는 다는 야고보의 이 경고에 직면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이 경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교사가 되는 일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교사의 일은 바른 의사 소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잘못된 의사 소통의 결과는 야고보가 지적한 것처럼 대단히 심각하다. 청소년들의 지적, 도덕적, 영적 건강과 행복이 어느 정도 중요한 부분까지는 교사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모습과 교직의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하다면 교직을 맡지 않도록 하라.

교육 방식/근원; 우리가 어떤 교사인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내용보다는 인격의 소산물에 의해 드러난다. 당신의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많은 교사들은 그들의 학문연구에서 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을 잠깐 살펴보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는 우리가 소유하는 지식의 양보다는 자식의 적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주 흔한 또 하나의 대답은 경험에서 온다는 것이다. 학교의 교무실에 있는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은 교사들이 유능하여 매일매일 가르치는 일을 훌륭하게 해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혜로운가? 아마 당신도 그들 모두가 다 지혜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사들은 자신의 교육방식을 학과목에 대한 지식이나 교육 경험, 혹은 이 두 가지 모두를 근거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지혜가 인격, 한 개인의 전반적인 영적, 도덕적 모습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두 종류의 지혜; 야고보는 기본적으로 두 종류의 지혜가 있다고 제안한다. 하나는 참 지혜이며 다른 하나는 인용 부호를 친 거짓 ‘지혜’이다. 이 두가지는 교육 과정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1. 이 세상의 지혜; 먼저 거짓 지혜를 살펴보자. 이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약 3:15). 이 ‘지혜’는 완전히 이 세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마귀적’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마귀에서 나오는’을 의미하며, 이 말은 우리에게 어떤 ‘지혜’는 어둠의 능력에서 나온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이 세상의 가치와 사고 방식에 기초를 두며 이기적인 욕심과 육체의 욕망으로 결정된다. 모든 것에 앞서 개인적인 이익과 만족을 확보하고자 쓰는 추진력이다. 그런 ‘지혜’는 어쩔 수 없이 무질서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설상가상으로 인격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세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기준에 근거한 교육방식은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성공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한계가 있고, 다른 면을 보지 못하며, 이기적인 방면으로 위험한 모든 것에 개방될 것이다.

2. 위로부터 난 지혜; 야고보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 17)라고 말한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여덟 가지의 특별한 방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1) 성결(pure, hagnos);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선결한’ 혹은 ‘순수한’이란 뜻이다. 이는 원래 ‘하기오스’(hagios-거룩한, 더럽혀지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세서 나온 말이며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의미가 있다.
2) 화평(peace-loving, eirenikos); 이 단어는 ‘평화로운’ ‘정쟁을 하거나 공격을 하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특징의 주요 관심은 조화를 이루고 좋은 관계를 증진하며 적과 화해를 이루는 데 있다.
3) 관용(considerate, epieikes);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양보’ 혹은 ‘고분고분한’이란 뜻이며 ‘친절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지혜의 이 특성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원리 원칙을 고집하기를 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을 충분히 고려하여 결과적으로 인내하며 절제한다.
4) 양순(submissive, eupeithes); 성경의 다른 번역판에서는 ‘부탁하기 쉬운’ 혹은 ‘이성으로 판단하기 쉬운’으로 번역되는데 이 번역이 단어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 뚜렷한 주관의 부족이나 의지의 박약이 아니라 오히려 동정적이며 또 강요되지 않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쉽게 설득되는’ ‘고분고분한’이란 뜻이기도 한다.
5) 긍휼(full of mercy, eleos); 이 단어는 친절, 친절한 행위, 인내를 나타낸다. 이는 동정심과 자비가 나타나는 행위 속에서 보여진다. 이 단어의 강조점은 감정 상태보다 오히려 행동에 있다. 따라서 지혜로운 교사는 학생들과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서 참고 인내하며 이해할 뿐 아니라 동정심과 이해할 뿐 아니라 동정심과 친정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6) 선한 열매가 가득함(full of good fruit, carpoi agathoi); 선한 열매, 선한 말과 행위, 선한 결과는 분명히 그런 결과를 낸 사람의 내면적인 인격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여기서는 다시 특정한 개인의 인격보다는 행한 일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그리스도인 교사가 선하고 건전한 행동을 하며, 가장 적극적이고 가치 있는 일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준다.
7) 판벽 없음(impartial, adiakritos); 이 단어는 원래 ‘나누어지지 않은’, 따라서 ‘편벽됨이 없는’, ‘변덕이 없는’이란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판단과 행위가 공평하고 의롭다는 개념을 ‘동정’(앞에서 열거된)이란 단어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8) 거짓이 없음(sincere, anypokritos); 이 단어는 문자적 의미는 ‘위선이나 가장이 없는’이란 뜻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며 가장되지 않으며 전혀 거짓이 없다.

요약; 그리스도인 교사를 위한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야고보의 말씀을 요약해 보자. 그리스도인 교사는
1. 교육이라는 특별한 직무로 부르심을 받았다.
2. 성결하고 화평하며 진실하다.
3. 관용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이 열려 있고 편벽됨이 없으며 긍휼이 많다.
4. 열매 맺는 삶을 산다.
이런 표준에 못 미친다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그 분의 은혜의 능력을 따라 위로부터 난 지혜와 총명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하여 점검표의 모든 항목에서 점점 더 성공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제 3 장 예수님의 3R 정책(1)-영접(Receiving)과 반응(Responding)

모든 어린이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어떤 아이는 사랑스러우며 순종적이고 귀여움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으나 어떤 아이는 완전히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순진하며 미성숙하다. 그들은 모두 이해와 분별력이 부족하다. 그들 모두 인간의 기본 질병인 죄에 오염되어 있어서 대부분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이나 모든 것을 앞에 놓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접근해야 하는가?

꼬리표 달기; 어린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여 그 꼬리표가 개인이나 그룹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다. 선입관에 의해 붙혀진 부정적인 꼬리표는 학생들을 그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긍정적인 꼬리표는 항상 부정적인 꼬리표보다 더 좋은 것을 염두에 두라. 어린이를 어떤 식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그 아이는 재빨리 그 방향으로 자라난다. “나는 네가 나를 특별히 도와주는 사람이면 좋겠어.” 내가 가르친 어느 교사가 한 학생에게 한 말이었다. 매번 그 어린이는 교사를 돕는 일을 했고 그 때마다 그 꼬리표를 사용하여 교사는 그를 칭찬했다. 머지 않아 그는 귀찮게 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정말 교사를 돕는 학생이 되었다.

예수님의 접근;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3-6)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면 흔히 ‘세 가지’(three Rs) 즉 읽기, 쓰기, 산수(reading, writing, arithmetic)를 배운다고 말한다. 주 예수님도 모든 어린이 주의해야 할 세 가지(three Rs)를 제안하고 계신다. 그것은 어린이들을 영접(receiving)하고 어린이들에게 반응(response)하며 어린이들을 존중(regard)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영접하기(receiving);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태도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사용된 ‘데코마이’ (dechomai)는 주어진 것을 사려 깊게, 준비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에게 하듯 그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은 환영해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어린이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환영할 때 당신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교사로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환영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생각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가? 내가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따라오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정말로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영접할 수 있는 방법인가? 그것이 당신이 학생들을 환영하는 방법임을 그들은 아는가? 당신은 그들을 위해 특별한 메뉴를 짜 놓고 각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방을 정돈해 놓았는가? 그들은 당신이 가르치는 영역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그들은 당신이 수업에 들어올 때 기뻐하는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아쉬워하는가? 실제로 수업할 때는 일부 학생들만을 더 열심히 가르쳤다. 나는 내가 가르친 모든 학생들을 환영하지 못했다. 사실 전혀 가르치고 싶지 않은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아마 나에게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리스도가 원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환영할 생각을 했더라면 상황은 달라 졌을 것이다. 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린이들에게 반응하기(response); 당신은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 그 답으로 예수님은 아주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맏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6절) 이 구절에서 ‘나으니라’로 번역된 말은 더 유리하거나 더 유익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소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다 깊숙이 빠뜨려지는 것이 그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반응하기 작업은 교실에서, 수업 준비에서 시작된다. 그 곳에서 많은 돌들이 파헤쳐지고 제거되어야 하며 부드러운 포석 재료가 선택되어 깔려야 한다. 나는 국어(영어) 교사로서 많은 교과서에 저질의 글과 수업하기에 의심스러운 주제들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항상 교과서에서 거친 ‘돌’을 찾아 파헤쳐 버리고 오직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내용만을 선택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빌립보서 4:8의 말씀은 수업 내용을 준비하는 모든 교사에게 훌륭한 지침이 된다. 가르치는 내용이 바른 것인지 의심이 생길 때에는 이 기준에 비추어 비교해 보라.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거짓된 것, 불순한 것, 악에 접하게 되는 일 등을 막을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이 좋지 않거나 저질스러운 내용을 올바로 분변하도록 가장 확실하게 도와주는 방법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내 가능한 한 아름다운 것들로 둘러싸이게 해주는 일이다. 그들이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의 올바른 기준을 실제로 이해하게 되면 그 때 참된 것에 반(反)해 나쁘고 거짓되며 추한 것을 진정 인식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나는 교사가 학생들이 실족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학생들이 유익한 내용을 배울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을 밝고 아름다우며 좋은 환경에서 가르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제 4 장 예수님의 3R 정책(2)

-어린이에 대한 존중(Regarding); “삼가 이 소자 중의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 18:10) 이 말씀은 모든 어린이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특별한 존재임을 믿도록 격려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반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스스로 쓸모없는 실패자, 혹은 전혀 가치가 없는 자로 믿게끔 만들었다. 예수님이 어떤 어린이라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 교사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를 당신의 교육 상황에 어떻게 적용하겠는가? 모든 교사는 두 가지 방법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관점을 재검토하는 일과 실천 여부를 재검토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학생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즉시 당신은 학생 개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다시 상기한다. 하나님은 개개인 모두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그 중의 누군가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올바른 관점은 이에 적합한 실천을 하게 한다. 한 어린이의 가치를 기억하는 그리스도인 교사라면 어떤 학생들은 용납하고 어떤 학생들은 배척하는 방법으로 교실 배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극소수의 학생만이 성취할 수 있는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 재능과 수준을 따라 평가받을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나님의 태도; 당신 학급에도 실망스러운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가 그들 모두를 환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길 잃은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잃은 양에게 어떻게 하는가? 그는 양을 찾아 우리도 데려올 생각을 한다. 이 일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양을 찾기 위해 먼 거리를 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 양을 찾는 일은 분명히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편한 일이다. 차라리 나머지 양들을 데리고 농장이나 더 편한 목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찾으러 나섰고, 그 양을 찾을 때가지 쉬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성공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기를 바라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한 명의 어린이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당신은 어떤 어린이도 잃기를 원하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 결론; 당신이 가르치는 모든 학생을 위해 다음 사항을 기억하라.
1. 누가 그들을 창조했는지 기억하라.
2. 각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하라.
3. 그리스도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라.
4. 그들을 가르치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것을 기억하라.


제 5 장 순종의 문제

대부분의 교육학은 어린이와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1. 어린이들은 원래 착하게 태어난다.
2. 어린이에게는 징계보다 오히려 사랑이 필요하다.
3. 부모와 교사들이 나가는 방향은 어린이들의 발전을 제한한다.
4. 어른들은 자신의 가치와 믿음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5. 어린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선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전체에 감염된 죄로 물든 상태로 태어난다. 그들은 순진하며 분별력이 부족하며 이해력도에도 한계가 있다. 그들은 쉽게 이끌리며 쉽게 흔들린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상처를 입기 쉽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사랑과 신뢰를 할 수 있고, 경배와 찬양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근본적인 필요는 먼저 사랑과 애정이며 개인적인 관심, 악으로부터의 안전과 보호, 훈련과 징계, 교훈과 가르침이다.

순종의 조건; 진정한 순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일이 있가? 필수적인 조건의 목록을 만들어 보는 일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 매우 중요한 사항이 있다.
1. 명령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합법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 정부 당국, 또 어린이에게는 그들의 부모와 교사가 포함된다.
2. 명령하는 사람은 존경과 신뢰받을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권위를 지닌 모든 사람이 신뢰받고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린이에 관한 한 이 조건은 결정적이다. 그들은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공인된 가치와 수준을 갖고 있으며 믿을 수 있는 인격적인 사람임을 확신해야 한다.
3. 명령, 규칙, 교훈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은, 어린이들에게 주어진 규칙과 지침이 명백하게 공정하며 논리적이고 요점과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하다.
4. 명령과 규칙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나는 당신이 부탁하는 일이나 어떤 요구를 훨씬 잘 맏아들일 것이다. 규칙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지만 학생들이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그들은 올바로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5. 명령한 것은 순종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규칙과 교훈은 당연히 합리적인 동시에 이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이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을 행하라고 말해야 소용이 없다.
6. 경계선이 처음부터 분명하게 정해져야 한다. 이것은 좋은 훈련과 실제적인 순종의 절대 필수적인 요소이다. 어떤 관계든지, 특히 교사와 학급의 관계는 처음에, 허용되는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아주 명백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경계선이 없는 삶이 훨씬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식의 접근은 하나님이 정하신 전체 사회 구조와 모든 개인의 진정한 본질을 손상시킨다.

불순종에 대한 성경의 관점; ‘불순종’은 사전에서 ‘반역’, ‘규칙 위반’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고의적이며 직접적인 도전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을 알면서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 길을 가는 것이다. 어떤 행동 유형은 불순종에서 싹튼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반복하여 계속 일어난다. 당신의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자.

은폐가 있는데, 이것은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환경을 탓한다. 정말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한다.
시무룩한 표정의 방어가 있다. 가인이 보여 주었듯이 우리가 진리에 맞부딪칠 때 나타난다.
불순종한 행동의 합리화가 있다. 사울이 한 것처럼 자신이 한 행동을 가능한 한 좋은 입장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공개적인 책임 회피가 있다. 아담, 하와, 가인, 사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죄와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계산된 거짓말이 있다. 가인과 게하시가 그랬던 것처럼 진실과 그 결과를 회피하는 일이다.

이 모든 열매는 썩는 것이며 재빨리 효과적으로 처치되어야 한다. 순종을 장려하는 데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한가지 방법은 불순종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일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다루시는 방식(창 3장)과 사무엘이 사울을 대하는 방식(삼상 15장)을 다시 살펴보라. 각각의 경우에 아주 명백한 명령이 행동의 경계를 정해 주었다. 불순종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범죄한 자는 그 사실에 직면하였고, 말씀을 듣는 일이 강조되었다. 그들이 이미 받은 명령을 다시 기억하라고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아주 명백하게 언명되었다.

순종의 복; 순종은 때때로 고통스럽지만 영원한 보상을 가져온다.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첫째, 듣는 것, 둘째는 자아의 자발적인 복종 - ‘나의 뜻대로가 아닌 당신 뜻대로’-이다. 이는 명령하는 사람에 대한 신임, 신뢰, 믿음도 포함된다. 순종의 반응은 믿음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순종은 “주님(혹은 선생님), 말씀하시면 하겠나이다”하는 것이다.

순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해 놓은 부분인 요한일서에서 순종에서 비롯되는 일곱가지 큰 복을 발견할 수 있다.
1. 지식;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3) 다시 말해 순종은 지식으로 이어진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순종하는 어린이들은 확실히 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계발시켜 나갈 것이다.
2. 온전함;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5) 온전의 개념은 완전해지는 것으로 이는 모든 교육의 목표이다. 당신은 학생들이 성숙하고 분별력 있으며 완전히 성장한 인격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이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에게 기꺼이 순종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3. 인격 성장; “의를 행하는 자는 그(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일 3:7) 요한은 ‘가장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가장 크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제안하는 것은 돈과 재산을 의식하는 우리 사회이다. 그는 ‘승리하는 사람, 혹은 가장 강한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어린이들은 늘 잘 생긴 사람, 성공한 사람, 권세 지닌 사람, 부자, 제멋대로 하는 사람만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믿게끔 압력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요한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당신이 공정하고 편견이 없으며 인격적인 사람이 되고 싶으면 옳은 것에 순종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4. 분별력;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이며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신실하게 순종하면 의롭고 분별력 있게 성장하는 능력을 키워 나갈 수 있다. 이 시대의 어린이들은 다급히 분별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순종하는 어린이들은 지식에서 자라 가며 바른 인격을 계발시키며 성숙과 온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5. 생명과 하나님의 도우심; “그의(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내주와 능력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따라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어린이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를 체험하며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그 분의 도우심을 즐긴다. 이것은 어떤 신학적 이론이 아니다. 신실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매일 경험하는 일이다. 순종은 그런 경험을 강화시킨다.
6.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5:2)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함으로 우리는, 함께 교제함을 통해서 큰 기쁨과 위로를 얻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함께 나누고 일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 드리는 일은 아름다운 특권이다. 힘들고 자주 외로우며 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특권이다.
7. 승리;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4-5) 그 분이 우리를 참가시킨 전쟁의 경우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벌써 이기셨다. 이제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고 복종하는 우리에게 이 승리를 주신다. 진실로 신뢰하는 어린이들이 진실로 순종한다. 그런 어린이는 항상 승리의 복을 받는다.


제 6 장 의사 소통자인 교사

당신의 의사 소통 기술은 어떠한가? 학생들은 당신의 말을 이해하는가? 당신은 그들과 ‘연결되어’있는가?

전달 내용 검토하기; 당신은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를 분석해 본 적이 있는가? 교사들은 수업 내용의 핵심 주제를 어떻게 훌륭하게 전달할지 생각한다. 그러나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이나 계획된 토론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징계하거나 칭찬할 때 어떤 말을 사용할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의사 소통에 관한 성경 말씀이 당신에게 실제 도움이 될 것이다.

혀 길들이기; 우리가 하는 말에 일관성이 없는 것이 어린이에게 실제 문제가 된다. 일관성 없는 교사는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충고를 얻기에는 잠언이 아주 좋다.
1. 일반적인 충고;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잠 10:20),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잠 20:15),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 25:11),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잠 15:28)
2. 훌륭한 의사 소통의 효과;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전 12:11)
1) 지식을 더한다.;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잠 16:21)
2) 교육한다.;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잠 10:21)
3) 지속된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잠 12:19)
4) 치료가 된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잠 12:18)
5) 반감을 깨뜨린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잠 15:1)
7) 환난에서 보호받는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리라” (잠 s21:23)
3. 나쁜 말을 삼가라;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벧전 3:10)
1) 죄로 이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0:19)
2) 노를 격동한다.;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5:1)
3) 영혼을 찌른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잠 12:18)
4) 영혼을 짓누른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It crushes the spirit)” (잠 15:4)
5) 멸망을 가져온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존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 13:3)
6) 미래가 없다.;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잠 12:19)

비언적 의사 소통; 사람들은 입뿐만 아니라 눈, 얼굴, 몸, 몸짓, 어조를 통해 보고 말한다. 항상 일관되고 똑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은 일관성이 없을 때 금방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태도;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언 12: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6-37)


제 7 장 목자인 교사

목자적 관심이란 무엇인가?; 처음 교직에 들어섰을 때 나는 모든 교사는 어느 정도 부모를 대신하는(in loco parentis) 위치에 있다고 들었다. 학생들이 내 책임 하에 있는 시간에 내가 할 일은 일종의 부모 역할이었다. 현재까지 교사들의 이런 역할을 묘사하는 가장 흔한 표현은 ‘목자적 관심’(pastoral care)이다.

목자의 역할;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겔 34:2)
1. 꼴의 공급; 목자는 양떼를 위해 좋은 목초지를 발견해야 한다. 양들이 잘 자라려면 좋은 목초지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목자인 교사에게 어떻게 적용하겠는가?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이 적합하며 좋은 양식으로서 그들에게 해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교과 내용을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수업 내용이 어린이의 나이와 능력에 맞아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키우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생각, 삽화, 이야기, 주제를 삼가한 내용이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2. 보호; 목자는 연약함을 안고 있는 양들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 학생들도 모두 보호를 필요로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으로부터의 보호이다. 많은 교과서처럼, 거짓 교사들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짓 사상과 태도, 가치를 전달한다. 당신은 잠시도 경계를 풀 여유가 없다. 당신은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기 전에 학생들이 읽고, 보고, 들을 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연약한 학생들은 강한 학생들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 말은 다른 아이보다 공부를 못하거나 연극, 음악을 못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뜻도 된다. 모든 학생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교사의 책임이다.
3. 개인적 관심; 목자는 각 양의 필요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양을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각각 교육 단계에서는 같은 학년에 있지만 개인적인 필요가 모두 다른 개개인이다. 교사는 바쁜 생활 속에서 그들을 똑같이 대하기가 훨씬 쉽다.

예수님의 본; “양은 그의(목자의)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3-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4)
• 선한 목자는 모든 양의 이름을 알며 그들도 목자를 알고 있다.
•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며 앞서 나아간다.
•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요즈음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교사를 뒷전에 놓고 학생들이 자신의 학습에 전적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사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사는 특정한 방향으로 학급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하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책임 회피이며, 어린이들에는 혼란과 실망을 가져다 준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은 모두 우리가 본이 되며 그들을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선한 목자인 교사는 학생들이 앞으로 나가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본을 보이며 앞에서 이끌어 간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는다. 이 말은 목자적 관심의 희생적인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학생들을 우선 순위로 놓기 위해 종종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 돌보기;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행 20:28) 그는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고 말했다. 훌륭한 교사가 되려면, 학생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말은 당신 자신을 잘 보살피라는 뜻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그가 가르치는 내용과 그 인격이 분리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완전히 진실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만큼 우리 자신의 인격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서 그 분에 의해 자유롭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제 8 장 군사인 교사

그리스도인의 전투;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사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이론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3-5)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군사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는 전투를 하고 있으며 싸워야 하고 바로 전쟁터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전술이 있고 사용해야 할 무기가 있으며 또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우리는 단지 방어군이 아니다. 우리는 공격해야 하며 포로를 잡아야 한다.

싸움터;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학교에도 침투해 있다. 보통 더 교묘하게, 그리고 쉽게 눈에 띄지 않게 침투해 있다. 그러므로 훨씬 위험하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마치 경마장 트랙이 그리스도인 기수에게 싸움터가 되는 것처럼, 학교가 그리스도인 교사에게는 싸움터가 된다.

전술;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이 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른이건, 아이건,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최고에 오르기 위해 때때로 이런 모든 전략을 다 사용한다는 것을 당신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리스도인 진영 밖에 있는 삶과 똑같은 방법과 무기를 사용하는 덫에 빠지기란 너무 쉽다.

그리스도인의 병기;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강력한 병기들은 의의 병기, 사랑의 병기, 진리의 병기이다. 이것들은 모두 당신을 더 훌륭한 교사로, 더 영향력 있는 교사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격려의 표시; 그리스도의 병기를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 우리의 지혜, 우리의 전문 지식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달려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칠 능력을 주셨고, 우리는 가르칠 장소에 두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그 분을 신뢰하면서, 매일 자연스럽게 전진하면 된다.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 사랑, 진리, 자비, 의,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하는 일 안에 있다. 우리는 깨어도 기도하며, 세상에 오렴되는 것과 세상의 우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일에서 분명한 사실이 한가지 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대담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제 9 장 향기 나는 교사

향기는 꼭 나야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성령으로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주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다. 당신 존재의 중심에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

향기는 전달된다.; 향기는 그 존재를 알려 준다. 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그 향기가 다른 모든 향기처럼 다른 사람에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교실이나 교무실에 들어갈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간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당신은 학교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가?

1. 언어의 향기;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벧전 4:11) 베드로가 설명한 방법대로 당신은 은사를 활용하면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것이다.
2. 행동의 향기; 주님의 향기로운 냄새를 전하는 두 번째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22) 향기나는 교사는 퇴근 시간에 맞춰 부리나케 나가려고 시계를 들여다보는 교사가 아니며, 인간적인 칭찬을 얻으려고 교장 선생임이나 교감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가르치지도 않는다.
3. 태도의 향기; 우리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가장 필요로 하는가? 학생들은 그들은 순수하게 사랑하는-감정적이지 않고 진정한 관심과 동정심을 지닌 사랑, 학생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교사를 필요로 한다.

향기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향기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향기, 아름다운 향기는 당신이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실에 남는다는 것을 우리 함께 기뻐하자.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당신은 그들에게 -그들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도처에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실 분은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그 학교에 두셨기 때문에 당신이 현재 그 곳에 있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든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고후 2:17).


제 10 장 교사다운 교사

전날 밤; 수업 준비를 하라. 올해 학생은 작년 학생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필요가 다 같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그들 나름의 독특한 풍조, 집단적 분위기와 반응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자기들을 위해 재미있고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준비해 오기를 바란다. 언제나 수업 준비를 하라.

수업 시간; 이제 기다릴 수 없이 일어나서 그들에게 간다.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혹은 교정하고(rectify) 징계하고(rebuke) 보강하라(reinforce) 학생들의 연령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잘못을 교정받을 필요가 있다. 때대로 그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분명히 그들을 꾸짖고 나무랄 필요가 있다.

평가의 문제; 교사는 계속 학생들의 인격 성장을 분석하고 생각과 지식을 시험하면서 항상 그들의 진보를 점검한다. 그리스도인 교사는 세상이 하는 방식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개개인을 보려고 노력해야한다.

성경의 본;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당신이 취해야 할 원리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도우심을 입어 겉이 아닌 중심을 보라. 학생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우라.

마지막 한 가지 생각; 모든 학교는 지식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학생들이 가능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를 바란다. 당신도 그 점에 동의할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 학생들에게는 분명히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지식보다 사랑을 더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 교사의 최고 은사는 사랑으로 덧입혀진 지식이다.


제 11 장 교사의 최고의 속성, 인내

“당신의 목표는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는 식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세상적인 어떤 기준에서는 보상을 받지 못할 일을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 있다. 일은 당신이 ‘더 나은 일’에 이르기 위한 디딤돌이 아니다. 그것은 구세주를 섬기는 행위이다.” (신앙 생활 지침, John White, 생명의 말씀사) 사회는 학교에 학문적인 성공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당신처럼 나도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하도록 도우려고 열심히 연구한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의 학업 능력뿐 아니라 인격 성장과 사회적 발달에도 관심을 가진다. 주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충성이다. 달란트 비유를 기억하는가? 주인이 칭찬한 것은 그 종의 충성이었다.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존 화이트는 우리가 하는 일이 구주를 경배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가르치는 일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교사에게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자질을 선택하라면 나는 인내, 오래 참음을 고르겠다. 인내에는 정확히 무엇이 포함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정의; 오래 참음(perseverance)의 사전적 의미는 ‘한 목적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변함없는 인내’ 로써 행동의 과정 중에, 혹은 일과 함께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중요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요동치 않음‘이고 다른 하나는 ’불변함과 전진‘이다. 인내(patience)는 ‘고통이나 분노를 조용히 참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조용히, 침착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인내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문제를 조용히 참고 견디며, 법석을 떨거나 고민하니 않고 기다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정의; 오래 참음과 인내는 결코 절망이나 좌절과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일을 절망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 참음을 어떤 것을 풀이 죽은 채 참아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어서 당신은 단지 이를 악물고 참아 낸다. 거기에는 어떤 기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조용히 꾸준히, 변함없이 오래 참으면, 당신은 틀림없이 일을 끝까지 해 내려는 결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갖게 된다. 거기에 실제로 희망이 있다.

인내를 향하여;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1)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벧후 1:5-7) 따라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인내는 필수적이다. 첫째, 인내는 당신이 쓸모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돕는다. 둘째, 당신의 인격이 성숙해 가도록 돕는다. 당신의 오래 참음은 당신 자신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


제 12 장 변혁을 위한 교육

오호라, 애통하는 시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본받는 문제; 오늘날 본받으라는 압력은 정말 강력하다. 거짓말, 이기심, 미움, 탐심, 혼외 정사, 부모와 법에 대한 불순종 같은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견해와 행동에서 가장 공통적인 변명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이다. 그들은 친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따라 하는 일이 옳으며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다. 어른들도 이웃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거나, 여러 사람의 생각이나 사회 풍습을 따라간다.

교육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어디로 교훈을 얻으러 가는가? 성경이 아닌 교육 전문가에게 갈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교사의 일을 하기 위해 그들의 전문 지식, 생각, 이론, 전략을 배운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교육을 기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본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가르치는 방법, 학생들의 본성과 필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더 이상 이 세상의 모습을 본받지 말라!’ 세상의 학자들이 교육과 아동에 대해 유익하고 통찰력 있는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 전제는 무신론이며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점에서 그들에게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교실에서 믿음으로 살며, 학교에 기독교적 지식과 행동 양식을 가져옴으로써 그러한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다.

변혁의 부르심;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 당신은 변화받는 일은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는 변화를 받으라고 쓰여 있다.

변형 과정; 당신은 마음을 바꿈으로-새롭게 함으로-변화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매일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을 매일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인정하며 그 분께 나가 그 분이 당신의 마음과 뜻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교육의 변화; 교육 그 자체는 세상이 기대하는 것을 할 능력이 부족하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능력을 공급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시면서-그들이 화해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성령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결론;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로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살후 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