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양육이 꼭 필요한 이유 4가지
이 시간에는 왜 양육이 필요한 것인지 몇 가지 이유를 알아볼까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양육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 즉 교회나 어떤 믿음의 단체가 자라기 위해 보통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전도이고 또 하나는 양육이며 마지막 하나는 행정입니다.
전도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에 시달리는 일입니다. 마치 전도자는 고삐가 주인의 손에 붙들린 채 주인이 몰고 가는 방향으로 달리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모는 대로 가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 사랑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가져야만 일어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어려운 작업이 전도입니다.
그러나 전도가 어려운 만큼 양육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계에는 교회성장의 방법으로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방법이 유행되고 있습니다. 87년 3월 29일 광주의 무돌교회는 총력전도 프로그램을 통해 몇백 명의 교인이 일만 오천 명을 동원시켰다고 한다. 87년 6월 14일 믿음의 집에는 이천의 교인이 3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87년 10월 25일 동일교회는 5천명을 동원목표로 세워 9천명이 동원됐습니다. 87년 6월 28일 인천 순복음교회는 교인수 육천명이 4만 천 육백 명을 동원했습니다. 87년 7월 13일 과천교회는 삼백 명의 교인이 7천명을 동원했습니다. 87년 9월 20일 망원교회는 교인 이백명이 삼천 칠백명을 동원했습니다. 88년 5월 1일 배광교회는 교인 일천 명이 일만 오천 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대부분의 교회가 이렇게 동원된 새신자를 그 후에 교인으로 거의 등록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전도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양육을 실패한 것입니다. 전도 받은 자들을 어떻게 양육하는가 하는 것은 양육하는 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어떤 이는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전도 받은 자 모두를 양육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모두를 잃어버리는 참상을 빚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전도가 하지만 그 하나님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 일은 양육이 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자기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만으로 양육을 다 한 것인 양 합니다. 그러나 평신도에게 성경을 알게 하려는 노력이 없이 설교자가 강단을 통해서만 교육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가뭄에 이슬을 받아먹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잘 준비된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을 기르는 강단양육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소그룹양육도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강단양육과 소그룹양육이 동시에 병행될 때 그 교회는 견고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왜 양육이 필요합니까? 목자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양떼는 그 지도자의 모습을 잘 살필 줄 아는 건전한 신앙인격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고래 떼들이 까닭 없이 바닷가 모래밭으로 올라와 벌렁벌렁 나자빠져 있는 모습 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동물보호단체나 환경보호단체가 이 엄청난 고래 떼를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쓰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고래들은 그런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죽어가게 됩니다. 이 이상스런 행태를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래 떼의 지도자가 어쩌다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그만 뭍으로 돌진해 버리게 되면 그 지도자를 따르는 수많은 고래들이 아무런 생각이나 주저 없이 그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뭍으로 올라오면 고래 자체의 엄청난 무게 때문에 바다에 돌아갈 수 없이 그대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가 신앙인들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끌기 위해 괴상한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미국의 3대 방송국 중의 하나인 ABC 방송국이 3명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Tele-evangelist(방송 전도자)의 뒷조사를 해서 보도하여 큰 쎈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전도자는 자기 집회에서 안수해서 넘어지는 것을 미리 사람들을 시켜서 넘어지게 했고 어떤 전도자는 병자들의 병을 점장이처럼 척척 알아 맞추는데 사람들을 시켜 참석하게 될 병자들의 뒷조사를 시키는 것이 기자들에게 의해 밝혀졌습니다.
또 어떤 전도자는 홍수 때문에 자기가 살던 집을 잃게 되었는데 TV에 나와 그 상황을 눈물로 호소하여 수백만 불의 헌금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런데 기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홍수로 잃은 집 외에 몇 채의 집을 더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명의 TV 전도자의 공통점은 다 백만장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뭡니까? 이러한 지도자가 생기지 않기 위해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 전에 양육이라는 과정이 필요하고 또한 이러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성숙한 신앙인을 만들기 위해 양육이라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왜 양육이 필요합니까? 영적인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 양육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태어납니까? 만들어집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대답은 '둘 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도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알 수 없고 전격적인 특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도력은 촉진되고 개발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각자는 확실한 직무를 위한 어떤 재능을 소유합니다. 이런 재능들은 때때로 어떤 위기가 그들을 훈련할 때까지 숨겨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재능들은 개발될 수 있고 개발되어져야 합니다. 그 개발의 과정이 바로 양육이라는 수단인 것입니다.
또한 대개 수양이 잘된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길들인 사람입니다. 양육은 재능을 개발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천성을 온전히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도달하고 지켰던 가장 높은 곳은 갑자기 날아올라 도달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동료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 밤에도 기어올랐기에 그들은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양육이라는 과정을 통해 좋은 영적지도자가 되고 좋은 지도자를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왜 양육이 필요합니까? 이름뿐인 크리스챤이 아닌 실천적인 크리스챤을 배양하기 위해 양육이 필요합니다.
조선 말엽 매관매직이 판치던 시절에 어떤 부패한 관리는 자신이 부임할 땅에 <야소교인>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먼저 조사해보고 그곳에 교회가 있고 극성스러우면 스스로 다른 고을을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자신이 필연코 저지를 부정과 부패가 그 <야소교인>들로 말미암아 방해받는 사례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반도를 수놓은 교회의 십자가는 왜 이토록 힘이 없습니까? 바로 실천적 크리스챤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듭난 크리스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뿐인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크리스챤이 되기 위해 양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2.8%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어두움이 기승을 부리는 사회라면 단 2.8%의 실천적인 크리스챤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철학적 기반 위에 능동성이 더해질 때 그 사랑이 감동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한 말씀의 원리들이 능동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나타내기 위해 우리들은 양육을 받고 양육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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